곽익 霍弋
인물 소개
곽익은 자가 소선이며, 남군 지강현 사람 곽준의 아들이다. 선주 말년에 태자사인이 되었고, 후주 때 알자를 거쳐 제갈량이 한중에 주둔할 때 그의 기실이 되었으며, 제갈량이 죽은 뒤 황문시랑을 거쳐 태자 유선(劉璿)의 중서자가 되었다. 정사 촉지 권11 §2 · 6
뒤에 내강둔 부이도독·호군으로서 영창군의 이·료를 토벌하고, 감군·익군장군으로 건녕태수를 겸하며 남쪽 군들의 일을 통솔했다. 경요 6년(263) 안남장군으로 호가 올랐고, 그해 촉이 위에 병합되자 파동의 나헌과 함께 한 지방을 온전히 지키다 위에 귀부해 전의 직임을 그대로 맡았다. 정사 촉지 권11 §7–8
진수의 평은 아버지 곽준만 들고 곽익은 따로 평하지 않았다. 연의에는 제119회에 건녕 태수로 나와 120회 가운데 1회에 등장하며, 이름이 회목에 든 회는 없다. 성도가 함락되자 사흘 동안 크게 울고, 후주가 위에서 작위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군사를 이끌고 와서 항복한다. 정사 촉지 권11 §50연의 제119회 §24 · 26
정사 기록
아버지 곽준은 자가 중막이고 남군 지강현 사람이다. 형 곽독이 모은 부곡을 이어 거느리다가 유표가 죽자 선주에게 귀순했고, 가맹성을 지키며 유장의 장수 부금·향존 등 1만여 명에게 1년 가까이 포위당하고도 함락되지 않았으며, 끝내 나가 쳐서 향존의 목을 베었다. 선주가 촉을 평정한 뒤 재동태수·비장군이 되었으나 관직에 있은 지 3년 만에 마흔 살로 죽었고, 선주는 몸소 신료들을 거느리고 조문하고 제사 지냈다. 정사 촉지 권11 §2–4
곽익은 자가 소선으로, 선주 말년에 태자사인이 되었다. 후주가 즉위하자 알자에 임명되었다. 건흥 5년(227) 승상 제갈량이 북쪽으로 한중에 주둔할 때 곽익을 기실로 청하여, 자기 아들 제갈교와 함께 어울려 지내게 했다. 건흥 12년(234) 제갈량이 죽자 곽익은 황문시랑이 되었다. 정사 촉지 권11 §6정사 촉지 권3 §8 · 15
연희 원년(238) 후주가 태자 유선(劉璿)을 세우자 곽익을 중서자로 삼았다. 유선은 말 타고 활쏘기를 좋아하여 드나드는 데 절도가 없었는데, 곽익은 옛 도리를 끌어와 할 말을 다하여 바로잡으려 간했고, 진수는 서로 갈고닦는 도리를 매우 잘 얻었다고 적었다. 정사 촉지 권11 §6정사 촉지 권3 §19
뒤에 참군·내강둔 부이도독이 되었고, 호군으로 옮긴 뒤에도 일을 통솔하는 것은 전과 같았다. 이때 영창군의 이·료가 험한 지세를 믿고 복종하지 않으며 여러 차례 노략질하자, 곽익에게 영창태수를 겸하게 하여 별동군을 거느리고 토벌하게 했다. 곽익은 그 우두머리를 베고 마을을 부수어 군의 경내를 평온하게 했다. 감군·익군장군으로 승진해 건녕태수를 겸했고, 돌아와 남쪽 군들의 일을 통솔했다. 경요 6년(263) 안남장군으로 호가 올랐다. 정사 촉지 권11 §7
이해에 촉이 위에 병합되자, 곽익은 파동의 영군인 양양 사람 나헌과 함께 각각 한 지방을 온전히 지키다가 그대로 들어 위에 귀부했다. 두 사람은 모두 전의 직임을 그대로 맡았고, 은총과 대우가 더해졌다. 정사 촉지 권11 §8
위 삼소제기에 실린 함희 원년(264)의 조서에 따르면, 교지에서 오의 장수 여흥이 손휴의 사자 등구 등을 죽이고 태수를 몰아낸 뒤, 도위 당보 등을 진승현으로 보내 남중도독·호군 곽익을 통해 표문을 올려 스스로의 뜻을 아뢰었다. 정사 위지 권4 §128 · 135–136
진수는 권 끝의 평에서 곽준이 외로운 성을 지켜 기울지 않았다고 들었을 뿐, 곽익에 대해서는 따로 말하지 않았다. 진수 본문은 곽익이 죽은 해와 죽은 곳을 적지 않는다. 정사 촉지 권11 §50 · 5–8
연의 묘사
연의 제119회에서 위가 성도를 차지하고 후주를 낙양으로 옮긴 뒤, 건녕 태수 곽익은 성도를 지키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 흰 상복을 입고 서쪽을 바라보며 사흘 동안 크게 운다. 장수들이 한나라 임금이 이미 자리를 잃었는데 어찌 어서 항복하지 않느냐고 하자, 곽익은 울면서 길이 막혀 주상의 안위를 알 수 없다고 답한다. 연의 제119회 §22 · 24
곽익은 위주가 주상을 예로써 대우한다면 그때 성을 들어 항복해도 늦지 않지만, 만에 하나 주상을 위태롭게 하고 욕보인다면 주군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 법이니 어찌 항복하겠느냐고 말한다. 무리가 그 말을 옳게 여기자, 곽익은 사람을 낙양으로 보내 후주의 소식을 알아보게 한다. 연의 제119회 §24
낙양에서 사마소는 후주를 안락공으로 봉하고, 아들 유요(劉瑤)와 번건·초주·극정 등도 후작에 봉한다. 곽익은 후주가 작위를 받았다는 소식을 알아내고서야 휘하 군사들을 이끌고 와서 항복한다. 연의는 그 뒤로 곽익의 일을 적지 않는다. 연의 제119회 §25–26
연의와 다른 점
등장 때의 관직: 연의 제119회는 곽익을 건녕 태수라고만 부른다. 정사에서 곽익은 감군·익군장군으로 건녕태수를 겸하며 남쪽 군들의 일을 통솔했고, 경요 6년(263)에는 안남장군으로 호가 올랐다. 연의 제119회 §24정사 촉지 권11 §7
앞의 이력: 연의는 제119회 전에는 곽익을 적지 않으며, 그가 곽준의 아들이라는 것도 밝히지 않는다. 정사에서는 곽준의 아들로, 태자사인·알자를 거쳐 제갈량의 기실과 태자 유선(劉璿)의 중서자를 지냈고, 영창군의 이·료를 토벌했다. 연의 제119회 §24정사 촉지 권11 §6–7
성도 함락 뒤의 곡과 말: 연의 제119회에서 곽익은 사흘 동안 크게 울고, 주상의 대우를 보고 항복 여부를 정하겠다며 사람을 낙양으로 보낸다. 진수 본문에는 이 곡과 말이 없고, 촉이 위에 병합되자 나헌과 함께 각각 한 지방을 온전히 지키다가 그대로 들어 위에 귀부했다고만 적는다. 연의 제119회 §24정사 촉지 권11 §8
함께 귀부한 사람: 연의에서는 곽익이 혼자 휘하 군사를 이끌고 와서 항복하며, 나헌은 나오지 않는다. 정사에서는 파동의 영군인 양양 사람 나헌과 함께 각각 한 지방을 보전하고 귀부했다. 연의 제119회 §26정사 촉지 권11 §8
항복 뒤: 연의는 곽익이 항복한 뒤의 일을 적지 않는다. 정사에서는 나헌과 함께 전의 직임을 그대로 맡고 은총과 대우가 더해졌으며, 함희 원년(264)에는 남중도독·호군으로서 오의 장수 여흥이 올린 표문을 전했다. 연의 제119회 §26정사 촉지 권11 §8정사 위지 권4 §136
3KDEX 집필(검수 전) — 문단 끝의 표지는 근거가 된 정사 권 · 연의 회의 그 절로 이어진다.
능력치
정사(진수 『삼국지』 본문)의 점수가 기준입니다. 연의가 같은 인물을 어떻게 다시 그렸는지 항목마다 견주고, 두 원전의 근거로 차이를 설명합니다.
- 통솔6242−20
- 무력4538−7
- 지력4850+2
- 정치5540−15
- 매력4850+2
- 덕6272+10
- 처세5858±0
- 문예4535−10
- 언변4540−5
- 용인4035−5
연의가 만든 능력치 — 정사와 다른 곳 차이 10점 이상
비슷한 곳 6개 — 근거 보기
정직접 기록 없음 — 여흥의 표문을 전달한 일로 추정위지 권4 §136
연직접 기록 없음 — 추정제119회 §24
정사 연의 추정 직접 기록이 없어 행적으로 매긴 값(근거 등급 C)
3KDEX 채점 — 정사는 진수 『삼국지』 본문, 연의는 『삼국지연의』 120회 본문이 근거다. 근거 표지를 누르면 원문 리딩의 그 절로 간다.